2018년, 20살, 대한민국
수능이 끝나고 대학에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대학교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었다. 잘 나가는 고등학교 동창들을 보면 한없이 한심해 보이는 내 현실이었다. 낭만은 많았지만 능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하고 싶은 일들은 밤새 말할 수 있었지만 그중 하나라도 하기 위한 노력은 그다지 하지 않았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속 사진작가가 되고 싶었다. 뉴욕 타임즈를 위해 중동 지역에서 총알을 피해 다니며 전쟁을 취재하고 싶었다. 홍콩, 이집트 등 당시 정세가 불안정한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국내에서 주최하는 크다는 사진 공모전을 여기저기 찔러 넣어봤지만 수상은 한 번도 못했다. 사진 실력에 문제가 있었을까. 열정이 부족한 걸까. 내가 잘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영어도 어중간하게 잘했고 사진도 어중간했고.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모습이 숨 막히게 답답했다. 미친 듯이 전공 공부를 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그닥.
무엇을 해야하는가. 공무원을 준비해야 하는가. 또 지긋지긋한 수험 생활을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닭장 같은 독서실. 들리는 것이라곤 옆 사람의 숨소리와 불안하고 불규칙하게 두근거리는—거슬리게 크게 들리는—내 심장 소리. 가슴이 불안하게 뛰는 일들은 안정적인 결과를, 가슴 설레게 뛰는 일들은 파멸적인 미래를 그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사진을 전공으로 하라 했다. 하지만 예술을 전업으로 하기에 용기가 부족했다. 몇 달간 업계 현황을 알아보기도 했다. 뭐든 하기 나름인 거 알았지만, 예술을 전공으로 하기에 집안 사정이 넉넉지 않았다는 적당히 비겁한 핑계도 있었고, 사진업에 종사하는 (특히 언론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말 하기를, '사진을 전공으로 하기보다는 다른 인문 철학을 전공으로 하여 사진에 깊이를 더하는 게 낫다'라고 하니. 그렇게 또 어중간한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뭘 잘하는지도 모르는 애매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여름 방학이 됐다. 학기가 끝났다. 재미도 감동도 없던 첫 대학교 학기가 끝났다. 술도 거의 안 마셨다.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알게모르게 더 침울해졌다.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과 모임도 첫 오티만 다녀오고 엠티도 가지 않았다. 가끔 나가던 술자리에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듣기만 했다. 살면서 이렇게 적게 말하고 산 적이 없었다. 수다쟁이가 조용해지면 속은 낙서로 가득 채워진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더 자주 어울리기 시작했다.
짝사랑했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말 한 번 못 걸어봤었다. 그런 내 모습도 참 한심했다.
불평만 할 줄 알고, 변화를 위한 노력은 하지 않는 내 모습이 너무 미웠다. 욕심이 탐욕이 되는 순간은 노력이 결부 될 때. 욕심이 야망이 되는 순간은 걸맞은 노력이 함께할 때. 아, 열심히 살아볼 용기도 없었다.
뒹굴뒹굴 집구석에서 자기비판을 하다. 일자리 권유가 들어왔다. 속칭 숙식 노가다. 건설 현장 근처에 거주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근무하는 일이다. 장소는 제주도. 1주일 조금 넘는 기간. 80만 원을 벌 수 있었다. 고민 없이 작업복, 잠옷, 속옷. 백팩(무려 잔 스포쯔)에 구겨 넣고 곧바로 제주도로 향했다.
숙식 노가다를 위한 제주도 행 선박에서 작성했던 일기 일부
목포항까지 차를 끌고 이동한 다음, 간단히 식사를하고 중형급의 크루즈선 지하에 차를 선적하고 승객칸으로 올라왔다. 배는 컸다. 세월호, 타이타닉, RMS 퀸 메리 호가 생각났다. 찾아보니 정말 RMS 퀸 메리 호와 동명 이선이었다.
거대한 배 옥상은 담배 피기 딱 좋았다. 바닷바람 맞으며 피는 담배는 멜랑콜리했다. 지금 피는 담배. 수명을 갉아먹고 있겠지. 하지만 당장은 왜 오래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좋든 나쁘든 이것저것 다 해보고 싶다. 그냥 싫어하는 일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제주에 도착해서, 낭만이나 여유를 느낄 틈도 없이 곧바로 숙소로 이동했다. 조금 심심했다. 하지만 별 기대를 안 했기 때문에 실망은 크지 않았다. 숙소는 서귀포 사계로 쯤에 있는 이한하우스 302호.
공부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
일은 꽤 힘들었다. 바로 시원한 대학 강의실이 생각났다. 무식하게 겁 없던 나였지만 발 한번 헛 디디는 순간 평생을 불구로 사는 높이. 바닥에는 폐자제가 아무렇게 널브러져 있어서, 떨어지면 부식된 쇠막대에 몸 어디가 뚫릴지 몰랐다. 그래도 일용직 노동자로 고등학생 때부터 일한 경험이 있어서 별생각 없었다. 힘들어봤자 얼마나 힘들까.
근무 둘째 날, 같이 일하던 40대 베테랑 노동자가 짐을 챙겨서 육지로 올라갔다. 미쳤다. 날씨가 30도 아래로 내려가질 않았다. 햇살이 심한 시간에 그늘 밖으로 나가면 피하지방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 선크림의 존재를 모르던 시절이라. 자연 태닝은 꽤 순조롭고 고통스럽게 진행됐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갈증이 심했다. 입이 툭하면 말라서 목소리가 쩌적 쩌적 갈라졌다. 들어야 하는 자제는 끝이 없었다. 공업용 커터칼, 달아오른 시멘트, 흙먼지, 폐자제, 매미소리, 여기저기 찢어진 피부, 멀리서 불어오는 시시한 바닷바람. 새벽과 밤이 아니면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은 몇 년 뒤 군생활 때 있던 어떤 작업도 비교적 우습게 만들었고, 80만 원은 아주 의미 있는 돈이 됐다. 이 일에 비교하면 새벽 택배 상하차도 비교적 할만했던 것 같다.
part. 2는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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