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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트의 제목은 의문과 권유를 중의적으로 표현한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Aimez vous Brahms...) 제목에 대한 오마쥬예요... 안 봐도 정색하는 거 보이니 그냥 아래로 스크롤해줘요.
아래 더보기는 스토이시즘에 대한 Wikipedia 영문 내용
Stoicism is a school of Hellenistic philosophy founded by Zeno of Citium in Athens in the early 3rd century BC. It is a philosophy of personal ethics informed by its system of logic and its views on the natural world. According to its teachings, as social beings, the path to eudaimonia (happiness, or blessedness) is found in accepting the moment as it presents itself, by not allowing oneself to be controlled by the desire for pleasure or by the fear of pain, by using one's mind to understand the world and to do one's part in nature's plan, and by working together and treating others fairly and justly.
한국 위키피디아에는 스토이시즘이 아닌 스토아학파 내용만 있어 영문 위키피디아의 정의를 가져왔다. 요약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논리 체계에 근거를 두고 도덕을 형성하는 철학을, 스토이시즘이라고 한다.
한국에서—특히 기독교인들—스토이시즘은 극기주의, 금욕주의라고도 해석된다. 하지만 금욕주의와 스토이시즘은 다르다. 금욕주의는 아세티시즘(asceticism)이라고도 부른다. 아세티시즘은 실천적이다. 자신의 육체에 적용한 규율을 통해 영혼을 단련하는데 목표가 있다. 반면 스토이시즘은 주변에 대한 정신적 태도를 수련하는, 철학적인 성격이다. 아세티시즘과 스토이시즘은 서로 공유하는 영역이 있지만 둘은 다른 성격을 갖는다.
스토이시즘이 자살을 권유한다며 국내 기독 성향 학자들이 스토이시즘을 격하하는 내용이 있다. 스토이시즘의 자살은 현생이 정의롭지 못하고, 비겁한 와중 그런 삶을 바꿀 수 없을 때, 차라리 명예롭게 죽음을 택하는 게 개인과 사회에 득이 된다는 말이다. 기독교리에서 자살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사후 지옥행을 의미한다. 국내 기독 학자들은 교리를 따랐을 뿐임을 알고 있다. 다만 자신의 교리에 어긋난다고 특정 철학·사상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순간, 종교인이 아닌 배타적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살아가다 혹여 마주친 비루하고 비겁한 인생에 출구가 없다면, 망설임 없이 숨을 끊겠다. 밝혀지지 않은 사후 부귀영화를 누리려 현생의 주변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건 내 논리와 불합 하기에. 죽음으로 더럽고 비루한 삶을 멈출 수만 있다면.
죽음은 우리들 곁에서 살아 숨 쉰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죽음은 매 순간 다가온다. 아직까지 종교를 믿어본 적이 없다. 어떤 종교도 논리로 이해할 수 없었다. 자살; 자의로 선택한 죽음. 그것이 인간을 지옥으로 몬다면, 노력으로 막을 수 있던 개인의 죽음도 자살인가?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죽음은 삶의 마침표다. 한 사람의 죽음은 결국 그가 행한 모든 선택의 결과다. 오늘 사망한 누군가도 어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죽음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인간적 선택이다. 죽음은 아무런 의견도 없다. 존재할 뿐이다. 자살, 타살, 자연사, 병사(病死) 등. 죽음의 다른 이름은 매우 인간적이다. 그리고 나열된 각기 다른 이름에 감정을 품는 것도 인간이다. 죽음은 감정이 없다. 죽음은 결과다. 그리고 삶은 과정이다.
처음 스토이시즘을 접한 건 고등학교 윤리 수업시간이다. 수능을 위해 외웠다. 체화의 시작은 군에 있을 때다. 수면, 식사, 인간관계, 태도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통제받았다. 죽기 전에 언제 이런 각별한 관심을 받겠는가.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좋은 경험이라고. 하지만 매번 밝게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논리와 이성이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서 '살면서 다시 겪을 수 없는 경험'이라며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짧은 순간이라도 쓸모없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기 싫었다. 그래서 철학을 다시 찾았다. 처음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겪은 심리·신경학자 빅토르 프랑클(Victor Emil Frankl)의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였다. 로고테라피(Logotheraphy)와 삶에 대한 태도를 배웠다. 아직도 암송하는 문장이 있다.
If there is a meaning in life at all, then there must be a meaning in suffering.
인생에 의미란 것이 있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게 고통, 속박의 시간 속 의미를 찾았다. 인내하는 힘. 자유의지를 빼앗겨도 열정과 희망을 잃지 않는 힘. 심지어 그 자유의지를 빼앗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힘. 군에서의 모든 고난은 몸과 정신을 탄탄하게 만들어줬다.
물론 쉽지 않았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꾼 게 아니다. 속된 말로 '정신승리'도 아니다. 바뀐 건 없다. 숨겨진 의미를 찾았을 뿐이다. 모든 고통은 의미와 함께였다. 숨겨진 의미를 찾았을 때—고통 속에서 성장하고 성숙해졌다.
혹여 성장을 위해 고통을 찾는다면 그만두라. 멍청한 짓이다. 고전 몇 권 독서하면 알 수 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할 때 몸과 정신은 망가진다. 도박을 할 필요는 없다.
그다음 읽은 책이 로마제국 1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이었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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