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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기

러브레터 (1995, 이와이 슌지)

스포일러 주의: 러브레터(1995), 라라랜드(2016), 카사블랑카(1942)의 줄거리가 언급됩니다.

 

읽으며 들어줬으면

https://www.youtube.com/watch?v=VrJAmltKVB4 



 

러브레터. 항상 보고 싶었지만 보지 않았던 영화. 우연히 보게 됐다. 이런류의 영화가 싫어서 안 봤던 것은 아니다.

 

렘젯(Remjet) 제거한 135 판형 영화 필름으로 사진을 찍을 만큼,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 중학생 때는 영문 영화의 자막 만드는 일이 취미였다. (첫 작은 레일웨이 맨 2013) 전공으로도 고민해 봤다. 마음에 드는 영화는 다섯 번 넘게 보기도 한다. 여기서 다섯 번이라는 횟수는 영화 채널을 우연히 넘기다 보게 되는 다섯 번이 아니라 처음부터 엔딩 크레디트까지 집중해서 보는 다섯 번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1999),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2013), 벤 스틸러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2013), 스탠리 큐브릭의 풀 메탈 재킷(1987), 스티븐 스필버그의 터미널(2004) 등등 잊을 수 없는 영화들은 많다. 

 

정말 마음에 들면, 뭐가 됐든 잊을 수 없다. 그게 영화라면, 감독이 구축한 세계관의 날씨와 문화, 지리, 모든 세부 요소에 푹 빠진다. 풀 메탈 재킷을 보고 베트남 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미 해병의 케산 전진 기지를 둘러봤다. 북베트남의 땅굴—지하기지—도 직접 들어갔다.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탐독했고 베트남 전쟁 자료에서 작계 자료, 사후평가 등을 잡히는 대로 읽었다. 베트남 현지에서 느낀, 영화 속에 들어온 기분은 잊을 수 없다. 마음에 드는 영화를 즐기기 위해 감정적으로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에 젖고, 더 나아가, 현실에서 영화를 체험하려 한다. 그냥 마음에 드는 영화 잘 봤다 라 말하며 툴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할 일하는 위인이 못된다. 

 

그래서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었다. 줄거리를 알아도, 명작이라는 것을 알아도, 보고 나서 앓을 후유증이 예상됐다. 웃어넘길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심각한 몰입이다. 일례로 고등학생 때 극장에서 라라랜드(2016)를 보고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구매한 사운드 트랙 시디를 두 달 넘게 들으며 이뤄지지 못한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를 곱씹었다. 결혼과 사랑을 종일 고민해보고, 잠이 안 오면 글로 정리해보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에 나를 대입해 어떻게 했을 것인지, 어떤 말을 했을까 와 같은, 너무도 쓸모없는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잘 만든 로맨스 영화의 여운의 파도가 가장 오래 남았다.

 

로맨스 영화에 빠지고 나면 너무 많은 할 일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물렁한 감상에 젖어 간단한 일도 집중하기 힘들었다. 결국, 로맨스 영화를 조금씩 기피하기 시작했다. 빠져버린 전쟁 영화는 영웅관을 만들어 줬다. 공상 영화는 상상력을 길러줬다. 로맨스 영화는 어떤 것도 주지 않고 고민과 질문만 남겨줬다. 그리고 이렇게 문화를 향유하는 습관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시간 지나 사랑이라는 서사에 던졌던 대답 없는 질문들은, 만남과 이별만 어렵게 만들었다. 올해로 스물네 살, 느끼는 것들을 백과사전처럼 정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계절이 바뀔수록 복잡해지는 감정 덕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아름다운 영화와 현실의 괴리는 현실 감각을 죽여버린다. 영화 속 사랑; 순수하고 풋풋하며, 간지럽게 자극적이고 흘러 넘 칠 듯 뜨거운 열정은, 마이클 커티즈의 카사블랑카(1942)의 한 장면.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Here's looking at you, kid)

 

처럼 폭발할 것 같은 마음을 축약한 아름다운 대사는—슬프게도—현실에 드물다. 우리의 서사는 두 시간짜리 스크립트에 담아 낼만큼 단순하지 않다. 긴 시간 우리를 구축한 많은 사건·사람들의 불가사의한 인과. 극적인 이야기를 비추는 영사기는 일상의 감정을 허무하게 만든다.

 

살아온 세상의 감상. 따뜻한 사람들은 적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주지 않는 사랑과 관심을 타인에게 기대한다. 비극도 기적도, 경험론(Empiricism)에서는, 만질 수 없는 구름의 촉감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오늘은 영화가 될 수 없다. 내일도, 올해도, 내년도. 이츠키가 사별한 남자를 잊길 바라는 아키바가 될 수도 없다. 소녀 이츠키를 사랑한 소년 이츠기가 될 수도 없다. 오타루는 멀고 이곳은 눈조차 내리지 않는다. 가끔 작은 일상 속 소중한 감정이 느껴질 때면 영화처럼 극적이고 특별한 일이 이뤄지기 소망한다. 현실감각은 멀쩡히 갖고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부담 느끼지 않게 표현하고 용기 낸다.

 

느껴지는 심장박동은 호감일까 사랑일까. 치열하게 고민한다. 깊은 고민이 싫어 쉽게 찌르고 쉽게 흘리는 마음을 미워하니까,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서. 소녀 이츠키를 사랑한 소년 이츠키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내가 소년 이츠키였다면 소녀 이츠키에게 책을 반납하러 갔을 때 사랑한다 고백할 수 있었을까? 소녀 이츠키가 소년의 마음을 일찍 알았더라면 좋았겠지만, 들키지 않고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은 서로에게 어렵기만 하다.

꽁꽁 숨긴 어려운 마음.

 

이곳에도 눈이나 펑펑 내렸으면.